‘베스트셀러’ 보잉737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까[이원주의 날飛]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2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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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飛’는 예티항공 691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우리 국민 2분과 그 외 모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사실상 가능해진 명절 연휴입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 설 연휴기간동안 37만 명 넘는 인원이 해외여행을 떠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가장 큰 국제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에서만 약 30만 명이 출국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작년과 비교하면 무려 1236% 증가한 수치입니다.

설 연휴 직전인 2023년 1월 20일 여행객으로 붐비는 인천공항 1터미널 출국장. 오른쪽 사진은 김포공항 국내선청사에 주기된 보잉737 기종. 동아일보DB


3, 4일 간 짧은 연휴에 멀지 않은 국가로 해외에 나갈 때 여행객이 가장 많이 접하게 될 비행기가 아마 보잉의 소형 비행기 737 기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1968년 처음으로 승객을 태우고 이륙한 이후 지금까지 총 1만1100대가 넘는 보잉 737이 하늘을 날았거나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 나고야 공항에 착륙하고 있는 보잉737 항공기. 동아일보DB
▶[이원주의 날飛]이 비행기 엔진은 왜 납작한가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420/89711834/1

하지만 보잉 737은 현재 생산되고 있는 737MAX 기종을 끝으로 더 이상 새 기종이 나오지 않고 단종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최근 보잉이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그로 인한 미국 정부의 규제 신설로 737 기종을 업그레이드할 이유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날飛’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지만 이제는 그늘이 드리운 이 작은 거인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보잉 737 중 가장 최신 기종인 737 MAX. 보잉
보잉 737 중 가장 최신 기종인 737 MAX. 보잉


모든 것의 시작은 보잉이 737을 업그레이드한 기종 737MAX를 내놓으면서부터입니다. 737 MAX는 기존에 있던 737NG(New Generation)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모델입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같은 이름의 차를 세부 디자인 변화, 신기능 추가 등으로 포장한 뒤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737NG와 737MAX 기종 비교. 엔진과 날개 끝부분 모양이 다릅니다. 보잉
737NG와 737MAX 기종 비교. 엔진과 날개 끝부분 모양이 다릅니다. 보잉


737MAX는 2017년 상업비행을 시작한 최신 기종이지만 보잉이 유례 없는 위기를 맞게 한 기종이기도 합니다. 2018년 인도네시아의 ‘라이온 에어’와 2019년 에티오피아항공의 737MAX 기종이 잇따라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두 항공기의 사고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원가 절감에 집착하던 보잉이 안전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변명할 수 없는 보잉의 실책이었습니다.

2019년 3월 10일 에티오피아항공 소속 737MAX 기종이 추락한 사고 현장에서 잔해를 수습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추락의 귀책 사유가 보잉에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찾아내서 보도한 시애틀타임스의 도미닉 게이츠 기자와 취재진은 이후 미국 연방항공청이 신규 기종 등에 대한 감항성 인증(항공기가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국가기관이 증명하는 인증) 절차를 직접 진행하지 않고 보잉에 사실상 위탁해 진행했다는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737MAX 기종의 잇따른 사고가 설계 결함이었음을 밝혀낸 심층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애틀타임스 도미닉 게이츠(왼 쪽에서 두 번째) 기자와 보도진. 퓰리처상 홈페이지
737MAX 기종의 잇따른 사고가 설계 결함이었음을 밝혀낸 심층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애틀타임스 도미닉 게이츠(왼 쪽에서 두 번째) 기자와 보도진. 퓰리처상 홈페이지


보잉에 대한 분노가 전 세계에서 들끓자 미국 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020년 가을 미국 의회는 항공기 인증에 대한 국가기관과 항공사의 책무를 강화하는 ‘항공기 절차 인증 개정 및 책임에 관한 법률’(the Aircraft Certification Reform and Accountability Act, H.R.8408)을 제정합니다. 사실상 보잉과 737MAX를 겨냥한 법률입니다. 그리고 이 법률 안에 보잉737의 ‘강제 은퇴’를 선언하는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미국 의회가 2020년 제정한 항공기 인증 절차 개정 및 책임에 관한 법률 표지와 해당 내용. 미의회
위 법률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명이나 화물 수송 목적의 비행기에는 운항승무원(조종사) 경보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에서는 경보와 주의보와 각종 안전에 대한 안내 사항이 구분되어 표시돼야 한다. 또 운항승무원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거나 조치를 취할 때 해야 할 행동을 우선순위를 지정해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보잉737에는 이런 시스템이 탑재돼 있지 않다는 겁니다. 보잉은 737MAX의 조종석을 보잉787 등 최신 항공기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여기에 보잉787 등 다른 기종에 탑재된 경보 시스템은 탑재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모양만’ 최신으로 보일 뿐 속은 그대로라는 의미입니다.

737MAX(위)와 737NG의 조종석 비교. MAX 기종의 조종석이 더 크고 선명한 화면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시스템은 향상된 점이 없다고 해당 기종 조종사들은 말합니다. 동아일보DB, 위키미디어
737MAX(위)와 737NG의 조종석 비교. MAX 기종의 조종석이 더 크고 선명한 화면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시스템은 향상된 점이 없다고 해당 기종 조종사들은 말합니다. 동아일보DB, 위키미디어


보잉에서는 이 승무원 경보 시스템을 엔진 정보 표기 및 승무원 경보 시스템(EICAS·Engine Indicating and Crew Alerting System)이라고 부릅니다. 보잉사의 다른 비행기인 747 767 777 787 기종에는 모두 이 시스템이 장비돼 있습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시스템이 에어버스에서도 전자 중앙 집중식 항공기 관리 시스템(ECAM·Electric Centralized Aircraft Moniter)이라는 이름으로 탑재돼 있는데, 에어버스는 모든 기종에 이 장비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보잉737의 최신 경쟁 기종인 에어버스의 A321neo. 에어버스의 모든 비행기에는 승무원 경보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에어버스


EICAS 시스템은 사소하게는 어느쪽 항공기 문이 열려 있다는 표시부터 중요하게는 심각한 안전상 문제까지 알려줍니다. 조종사는 EICAS에 표시된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합니다. 777 787 등 최신 항공기에는 조종사가 해야 할 조치까지 순서대로 나열해줍니다. 737MAX에 EICAS가 없다는 건 자동차로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최신 기종 차의 문을 열었는데, 어느 문이 열렸다는 표시가 디스플레이에 그래픽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빨간색 경고등만 하나 켜지고 끝인 상황.

자동차의 문이 열렸다는 단순한 표시등과 최신 자동차에 탑재된 자동차 점검 시스템이 문이 열린 곳을 표시해주는 모습. 위키미디어, 벤츠 홈페이지 캡처
자동차의 문이 열렸다는 단순한 표시등과 최신 자동차에 탑재된 자동차 점검 시스템이 문이 열린 곳을 표시해주는 모습. 위키미디어, 벤츠 홈페이지 캡처


자동차 문열림 경고등이 켜지면 모든 문을 열었다 닫아봐야 하듯이 737 조종사들은 경고등이 켜지면 일단 그 경고등이 ‘왜’ 켜졌는지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수많은 곳에 분산된 경고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부터가 일입니다. 반면 EICAS가 탑재된 기종의 조종사들은 바로 문제를 해결할 조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비상상황에서라면 두 조종사의 업무량 차이가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737 기종의 머리 위에 있는 오버헤드(Overhead) 패널. 패널 곳곳에 경고등과 상태 표시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그러면 보잉이 다음 737을 업그레이드할 때 EICAS를 장착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항공사에서 더 이상 그 737을 선호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돈 받고 사람을 태우는 항공사에서는 비행기에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면 무조건 조종사를 새로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항공사는 이 교육제도를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적잖은 교육기간동안 업무에 투입할 수 없으니까요. 교육비용도 상당합니다. 보잉이 737MAX를 출시하면서 추가된 조종 장비(MCAS)를 기를 쓰고 감추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교육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공항공사가 보유한 제트기 시뮬레이터. 조종사들이 기종 조종 자격을 받을 때 훈련하는 훈련 장비로 이 장비를 수 시간 사용하려면 많게는 수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동아일보DB


물론 수많은 항공사에서 운용하고 있는 737 기종이 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수십년 간 더 공항에서 737을 보고 탈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H.R.8408 법안 때문에 보잉은 현재 737MAX 중 두 하위기종(MAX 7과 MAX 10)의 인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보잉과 미국 내 737을 주로 운용하는 대형 항공사들의 로비로 결국 인증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저가항공사(LCC)인 사우스웨스트 항공. 770여 대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으며 모든 비행기가 보잉 737 기종입니다. 위키미디어


하지만 최초의 737인 레거시 기종(100, 200)을 시작으로 클래식 기종(300, 400, 500) - 차세대 기종(NG, 600~900) – MAX로 이어졌던 737의 역사는 막내인 MAX를 끝으로 끝날 공산이 높아졌습니다. 737보다 늦게 태어나 하늘을 주름잡은 ‘하늘의 여왕’ 747도 이미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흥망성쇠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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